산행후기

[빛바랜 산행후기]영남 알프스(신불산,영취산)산행

古山 2008. 4. 18. 06:35

(아래글은 영남알프스 산행시 같이간 산오름의 이경예님이 쓴 후기를 여기에 옮깁니다.)

 

prologue
산행 전날인 토욜 서산 사는 막냇동생네 가족과 집 근처에 사는 여동생네 가족까지 해서 모두 everland로 소풍을 갔다. 사실 어른들이 탈만한 놀이기구도 없고, 나 역시 원심력을 이용한 놀이기구는 질색인지라 별로 탈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우리 가족 모두가 모이는 기회인지라 아침 일찍 나섰다. 지난 일주일 내내 맑디 맑은 날씨가 그날따라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고, 입장료며 자유이용권 이용하는 것 땜시 조금 혼란이 있어 시간을 많이 지체했었다.
그럭저럭 놀다가 시간에 맞춰 6시쯤 나오는데.. 어쩌면 그리도 막히는지. 8시쯤 집에 도착해서 라면 끓여먹고, 8시 50분에 집에서 제부가 신도림역까지 바래다 주어 사당에 도착하니 9:25분. 집에서 도시락 준비를 못해 맛없어 보이는 김밥과 빵을 사고.

차멀미가 있는지라 멀미약을 먹고,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았더니 바로 뒷좌석에 신선우님이 일행을 모시고 왔는데. 한 사람이 많이 낯이 익었다. 알고 보니 같이 입학해서 2년 정도 같이 다닌 대학동문(제가 휴학을 해서 졸업연도는 다름). 그러고 보면 세상이 참 넓으면서도 좁다. 인천에 살고, 산행동아리도 서로 다른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최순호님이 부인이 데려왔다. 그동안 왜 순호님이 산에 못 나왔는지 바로 증명이 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예쁘고 착해 보이는 분이었다. 순호는 좋겠네.! *^^*

출발전
출발전에 갑자기 운한이가 맥주 2박스를 들고 들어온다. 송기수님이 그냥 회원들게 대접하고 싶어서 샀단다. 히히... 저, 맥주는 잘 마시는데. 우찌 그리 잘 아셔요?
밤 10시에 차는 출발을 하고. 10시 반쯤 맨 뒷좌석부터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한다. 부부가 두팀. 좋아보인다. 서로 취미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12시까지만 음주를 하기로 하고, 그 이후에는 서로를 위해 조용히 취침하기로 했다. 그리고 버스안에서는 절대 금연!
엉겹결에 맥주를 3캔이나 마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사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황간휴게소에 잠시 쉬는데.. 12시쯤. 갑자기 은영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단다. 그래서 다음 휴게소에서 쉬기로 했는데. 이런 갑자기 차가 멈춰 가지를 않는다. 몽롱하게 잠이 설핏 들다보니 반대편 차선이 완전히 텅 비어 시커먼 어둠만 몰려 있고, 우리편 차선에는 대부분의 차들이 불을 끄고 쉬고 있다.
우잉.. 이게 뭔일?
남자회원들 몇몇이 사태를 확인하러 차에서 내렸다. 한참 후에 들으니 앞에서 반대차선에 있던 추레라가 끌고 가던 물건인가 뭔가를 반대편으로 흘렸단다. 그 탓에 양쪽 차선이 완전히 막혀버리고. 3시쯤 우리쪽 차선에 있던 물건을 치우고 우리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3시 20분쯤. 지나면서 보니 시커먼 어둠만 몰려 있던 반대편 차선 역시 차들이 완전히 정체되어 있다. 그래도 그다지 걱정되지 않은 건 졸려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까닭인 것 같기도 하고, 정기산행이 망쳐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님 참석한 님들의 덕이라고나 할까?

쌩쌩 달리다가 휴게소에 잠시 내리는 데 비가 온다. 은영이하고 몇몇만 화장실을 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뒤에서 한명 두명 계속 나온다. 결국 여기서도 한 10여분이상 쉬고. 기사아저씨나 대훈형은 조금 맘이 급했을게다. 우연찮은 사고로 도착시간이 3시간 이상 늦어지고 있으니. 하긴 그래봐야 겨우 몇분 차이가 전체 산행에 영향을 미치기야 하겠나?

대훈형이 판수형과 계속 연락을 하며 약속지점을 찾는다. 경남 일대의 지리를 전혀 모르는 대훈형과 이쪽 방향은 거의 초행인 듯한 기사아저씨는 판수형이 말하는 지점을 정확히 파악해내지를 못한다. 이리저리 빙빙 돌며 양산 톨게이트를 지나고, 통도사 톨게이트를 지나 언양터미날쪽으로 향하니 그곳에 판수형의 차가 보인다. 간신히 도킹 성공!

언양시외버스터미날에 내려 판수형과 인사를 하고. 근처에 있던 7-11(seven eleven)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비가 내려 마땅히 아침을 먹을 만한 장소가 없어 컵라면을 사서 먹고.
(한가지 찝찝한 점은 라면 찌꺼기를 근처 하수구에 그냥 버린 점. 7-11에 분명히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을텐테. 아무래도 우리가 그렇찮아도 많이 오염되어버린 낙동강을 더 오염시킨 것 같아 조금 그렇다.)

등억리에서
언양터미날에서 등억리로 이동중에 보니 2대의 차가 더 보인다. 부경회원님들의 차란다.
등억산장 부근에서 영태님과 상국님과 인사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초입부터 조금 만만치가 않다. 등억산장에서 왼편으로 접어든다. 어제 내린 비로 계곡에 물흐르는 소리가 시원스레 들린다. 바위나 땅이 많이 젖어 있어 걷기가 쉽지 않다. 길은 좁고 미끄럽다.
한 10여분 가니 이정표가 있다. 왼쪽은 홍류폭포로 가는 험로이고 오른쪽은 조금 쉬운 길로 갈라진다. 영태님의 조언대로 오른쪽 길을 택한다. 그 길은 조금 지루하고 비스듬히 경사가 진 우회로가 연속된다. 걸으면서 보면 경사 45도 정도의 길을 위로 치고 올라가면 될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그 길이 연결되는지를 알 수가 없어 왼편으로 난 우회로를 계속 걷는다. 한 10여분 정도 걸으니 아래녘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다. 의외로 전망은 괜찮다.
지난 번에 잠깐 얼굴을 봤던 이혜영님이 무척 잘 걷는다. 지난번에 인수봉을 오를 때 첨이었는데도 암벽을 잘하더라고 기수형님이 칭찬을 했는데.. 워킹 역시 잘 하는 걸 보니 은근히 부럽다.

우회길로 계속 돌아가다 한번씩 언덕배기를 치고 올라가면 임도가 나온다. 게다가 새로 임도를 포장하려는지 흙으로 대충 깔은 길이 비로 흠씬 젖어서 온통 진창이다. 사실 이런 길은 걷기에 별로 편하지도 않거니와 산을 망치는 것 같아서 그다지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 또한 기껏 올라갔는데 잘 깔린 임도가 나오면 허탈하기도 하다.

홍류폭포 위 작은 폭포
출발해서 1시간여 정도 오르니 폭포라고 하기에는 작은 물줄기가 보인다. 계곡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오르니 예전에 신불평원에서 간월재로 가다 헤맨 기억이 난다. 그때 폭우로 길을 잃어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사실 하나만을 근거로) 오로지 물소리만을 의지하여 길 아닌 길을 찾아 4시간여를 걸었었는데...
후미를 기다리면서 작은 물줄기에서 세수하면서 손에 받쳐 마시는 물은 비가 온 탓인지 약간의 흙이 떠있기는 하지만, 마셔보니 물맛이 좋다. 수돗물이나 생수와는 전혀 다른 뭔가 맑은 느낌이 있다.


오늘 산행은 3 part로 나누어 선두는 판수형이, 중간은 기수형과 운한, 후미는 환선과 신호가 돕기로 했다. 물론 산행이란 것이 그렇게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어서 아무래도 걸음이 빠른 기수형과 운한이 선두로 나서게 되고, 판수형은 선두와 중간 사이에서, 그리고 후미는 환선과 신호가 소떼들과 여유있는 산행을 하고... 물론 나 leeky는 늘 그렇듯이 선두의 꼬리에서 열심히 선두만 쫓아가고...
(아직도 여유있는 산행을 즐기는 편은 못되는 것 같죠? 지치기 전에 빨랑 내려가야죠.... 헤헤... ^^)

길은 임도와 경사로가 서로 직각을 이루며 계속되고, 간혹은 경사로로 간혹은 임도를 따라 우회한다.
임도는 질척질척하여 신발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고, 경사로는 의외로 가파르며 길은 좁다. 괜한 마음에 그냥 우회로를 따라 가면 될 것을 괜히 무리해서 옷까지 버려가며 가파른 길을 오르기도 한다.

걷다보니 아주 적요한 외길의 소로이다. 오른편으로는 경사면의 오르막과 왼편으로는 우리가 걸어온 경사길과 우회길이다. 왼편으로 도시가 보이고...
여전히 선두는 혜영님이고 내 뒤에 오던 기수형에게 길을 양보했다. 걸음이 가뿐해 보여 부럽다. 내 바로 앞에는 신선우님이 평이한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걷고 있다. 어째... 넘 심심하다. 아니 너무 적요해서 간혹은 이 길이 맞나 싶어 조금씩 두렵기까지 한다.

임도를 벗어나기 전 판수형이 간월산 쪽에서 보이는 신불산의 측면을 보란다. 우와.... 직각을 이루는 斜面(사면)에 단풍이 장관이다. 어둑어둑한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 인지 약간은 위압하는 듯 해 괜히 움츠러든다.

간월재까지
임도를 벗어나며 경사길을 오르자 드디어 약간의 평지가 나타난다. 간월재이다. 간월재의 평지에는 바로 밑에까지 임도라서 소형트럭을 이용한 매점이 있다. 우리는 길의 오른 편인 간월재로 간다.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우리가 가야 할 신불산과 간월산의 사이에 있는 작은 재이고 여기까지 오는 데는 특별히 힘들일 것 없이 차를 타고 올라와도 된다. 뭐랄까? 괜히 힘써서 올라온 것같아 괜히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일정상에는 여기서 오른편에 있는 간월산에 들렀다가 다시 간월재를 지나 신불산으로 향하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시간상 촉박한 듯하여 눈앞에 가파르게 솟아있는 간월산은 눈으로만 대충 보기로 한다. 작년 억새산행때는 간월산부터 영취산까지 다소 무리인 듯한 산행을 강행했다고는 하던데....
(다행이다. 이구...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실 가파르게 솟아있는 간월산은 마치 설악산 대청봉 오를 때의 기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넘 가파라 보여 괜히 기가 죽는다. 우리는 반대편인 신불산으로 방향을 정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오로지 사진밖에는 남는 것이 없기라도 한듯...
(사실 이번 산행에서 사진기를 들고 가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다.)

갈림길(간월산장-신불산 정상)
매점이 놓여있는 작은 평지를 지나 가파른 암릉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어느새 기수형과 혜영님은 보이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같이 출발했건만 혜영님은 의외로 발걸음이 가볍고 빠르다. 별로 지쳐보이는 기색도 없이.
신불산 가는 길 역시 가파르다. 경남에 있다하여 산이 낮으란 법은 없겠지만, 신불산이나 영취산 모두 1000m가 넘는 산이다. 결코 만만하게 볼 산이 아니다. 게다가 처음에 우회로를 계속 걸었기 때문에 그 거리가 보다 더 늘어났다고나 할까?

높은 산의 특징상(내가 알고 있는 범위내에서) 나무들은 몸을 낮추게 되므로 키 큰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 무릎에서 허리께 정도까지 오는 작은 덤불숲이라고나 할까? 진달래나 철쭉나무로 보이는 나무들만이 보인다. 높은 산그림자때문인지 이미 갈색이 되어 버린 죽은 억새들만 가득하고...

계속되는 바윗길. 후미는 보이지 않고 선두 역시 보이지 않는다. 잠시 뒤처진 듯한 운한이도 혜영님과 기수형과 합류하여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근데... 왜 난 늘 혼자 걷고 있는 거지? 선두가 보이지 않고 후미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니까 괜히 겁이 난다. 간혹 갈라지는 길이 나오고, 내가 제대로 앞을 향해 걷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한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산행 초입부터 깔려 있는 짙은 회색의 구름은 여전히 벗어날 줄 모르고 내 머리위로 낮게 깔려 있다. 장마기간중의 하늘처럼 낮고 침침하여 음습한 느낌마저 든다.
한참을 멍청히 걷고 있다보니 고갯마루위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간월산장과 신불산 정상 가는 길을 나타낸 표지판이다.

표지판을 지나면서는 완전히 능선위로 올라섰다. 능선은 小 암릉구간이다. 아주 쭈뼛한 것도 아니지만 그런대로 맛은 있어 보이는 길이다. 날씨가 좀더 맑았다면 눈이 무척 시원했을 터인데 조금 아쉽다. 이렇게 높은 곳인데 여기저기 돌무지로 돌탑이 쌓여 있다. 전에 주흘산 갔을 때 계곡에서 본 것과 비슷한 광경이다
(계곡의 오른편으로 돌탑이 수십기가 쌓여 있었다).
내 뒤에 조용히 오시던 신선우님과 잠깐씩 경치를 구경하며 걷는다. 우리가 온 길과 우리가 가야 할 길... 이미 온 길은 고갯마루 뒤로 숨겨져 언뜻언뜻 보이기만 할뿐이다.

암릉구간을 지나 왼편으로 모롱이를 도는데....
기수형, 운한이, 혜영님이 쉬면서 간식을 먹고 있다. 나도 조금 지친 듯해 잠깐 쉬기로 한다.
혜영님은 연신 추운지 옷을 다 꺼내 입고 결국은 장갑까지 빌려 낀다.
한 5분여 쉬고 있었을까? 날이 너무 춥다. 사람들은 재촉해 다시 걷기 시작.....

신불산(1209m) 정상 도착
고갯마루를 올라서니 어느새 정상이다.
3년전에 왔을때와는 뭔가 다른 모습이다. 케이블 TV용 antenna 탑이 세워져 있고, 정상 표지석 부근은 편평하게 整地되어 있다. 좀 실망스럽다. 자꾸 이렇게 사람들의 손이 닿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싫다. 잠시 쉬고 있으려니 후미도 올라온다.
성원이가 영 속이 안좋은가보다. 올라오면서 4번이나 토했다고 한다... 차멀미의 여파라나?
간혹 빗방울이 뿌려서인지 너무 춥다. 옷을 꺼내입을까 말까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자켓을 꺼내 입었다. 사실 걷기 시작하면 겉옷은 무척 귀찮아지는데...
후미가 올라오고 다들 쉬면서 따뜻한 커피를 나누어 마시고 기념촬영을 한다. 환선이가 오늘의 산오름 찍사... 마치 사진사처럼 능숙한 마임을 곁들인다.

정상 아래 평원에서 점심
정상에서 밥을 먹기에는 바람도 막아지지 않고 춥기도 하고 시간도 이른 듯해 조금 더 가서 먹기로 한다(심지어는 하산해서 먹자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정상에서 능선을 내려가는 길에 갑자기 바람이 잦아들고 해가 들기 시작하자, 자리를 깔고 밥을 먹자고들 한다. 배낭에 없는 게 없다는 상국님. 텐트용 플라이를 꺼내고 100리터들이 쓰레기 봉투를 자리에 깐다. 주변에는 죽어버린 듯한 억새들이 어제 온 비와 비구름에 완전히 젖어 있다.

소떼들은 소떼들끼리 모여 점심을 먹고.. 신선우님과 그 일행분들도 모이고.. 우리는 영태님과 판수형, 상국님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진숙이가 싸온 보온도시락의 밥이 최고다. 따뜻해서 기분까지 좋아지려고 한다.
진숙아 Thank you !
다들 밥과 반찬을 많이 싸왔다. 단지 날이 추워 차갑게 식어버린 밥을 먹기가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상국님과 운한이가 버너를 켜서 라면물을 끓이고. 화용이가 움직일때마다 기껏 끓인 물을 쏟는다.
밥 먹는 장면을 누군가의 캠코더로 담았다면 상당히 재미있게 볼 수 있을텐데... 조금 아쉽다.
상국님이 커피국을 끓여 모두에게 나누었다. 이젠 정말 겨울로 들어선 모양이다. 따끈한 커피가 이렇게 맛있고 고마운 것 보니...

점심을 먹은 후 자리를 치우고, 쓰레기는 상국님이 가져온 쓰레기 봉투에 온갖 쓰레기를 담아 박점태님의 배낭에 넣는다. 점태님이 자신의 배낭이 비었다며 기꺼이 쓰레기를 나르기로 한 것이다.
Thank you !

신불평원을 가로지르며...
다시 고개를 넘어서서 내리막길로 들어서니 자잘한 돌길이다. 툭툭거리며 걸을만하기는 한데 조금 경사가 가파르다. 방금 전까지의 평원은 온통 죽은 색이었는데, 한 10여분 가파른 길을 내려서고 난 이후 살아있는 억새길이 시작된다.
왼편이 능선의 외곽이고 오른 편은 산의 내측 능선이다. 영취산부터 신불산을 거쳐 간월산으로 가는 길이 오른쪽을 중심으로 해서 퍼져 2/3쯤 잘린 도넛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리고 혹시 월출산을 가보신 분은 그런 길의 느낌을 기억하실 것이다. 능선을 내려치면 앞서 가는 사람이 평원을 가로질러 앞에 보이는 산으로 가고 있는 모습과, 뒤돌아보면 후미가 능선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는 평원을 가로질러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짙은 비구름의 한중간이 뚫리면서 앞에 보이는 영취산쪽 평원에 환하게 햇살이 들고 있다. 마치 무대위에서 조명이 그곳만을 비추는 것처럼 햇살이 눈부시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신불평원... 정말 무지 넓다.
걷다가 한번씩 뒤돌아보면 깍아지른 절벽에 단풍이 햇살에 빛나고. 어쩌면 이렇게 때를 잘 맞춰 왔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물들어있다.
단풍은 비에 젖어있을때는 비어 젖은 대로, 햇살에 비칠때는 찬란한 원색을 그대로 드러낸다. 주홍, 노랑, 빨강색의 잎들은 내 눈을 현혹시키기라도 할 듯 환하다.

걷다보니 내 키보다 약간 작은 억새숲이다. 어느틈에 햇살속으로 내가 들어와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억새들이 가볍게 출렁거린다. 소리도 없이 금빛의 물결을 일으키며...

혹시 80년대 \"맥콜\"이란 음료의 광고를 기억하시는지...
바람에 살랑거리는 보리밭이 배경이었는데... 실제로 내가 여기 이 억새밭에 들어와보니 그 아름다움이 내 몸속에 내 눈속에 내 머릿속에 그대로 찍혀 들어간다.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유년시절 보았던 무등산의 억새밭이 이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고 신선우님이 말씀하시지만, 내게는 이 정도도 너무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그저 행복하다. 아무 말도 필요없고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곳에서 이 장면을 누리고 있다는 것만이 행복하고 편안하다.

오른편으로 영취산정상에서부터 검은 색의 돌로 예전의 성곽이었을 듯한 흔적이 있다. 성루같은 것도 있고. 억새밭에는 검은 색의 돌은 보이지 않는데, 아마 산 밑에서 날라오지 않았을까 싶다.

영취산(취서산 1065m) 정상 도착
억새밭이 끝나는 지점에 약간 솟아있는 바위가 영취산 정상이다.
노란 배낭커버를 한 기수님은 신불산에서 내려올때부터 저 멀리 사라지더니 여기서 쉬고 있다. 혜영님과 운한이도 나보다 먼저 도달했고..
바람이 의외로 세다. 춥지는 않는데 몸이 가볍게 흔들린다.
후미가 도달하고.. 잠시 쉬다가 사진을 찍고 하산하기로 한다.

하산 시작
통도사 환타지아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정했다. 통도사 가는 길은 절 안쪽(백련암, 원효암을 지나야 하고, 거기서부터 통도사 입구까지도 1시간이 더 소요된다)으로 내려가게 되므로 그보다 조금 빠른 쪽으로 택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 난 내리막길은 넘 싫어!
경사가 장난아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거의 80여도가 된다고나 할까?
가파른 내리막길에 대한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진 나로서는 그야말로 .... 난감 그 자체이다. 다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내려간다. 내리막 초입에서 코스에 대한 약간의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다들 그 길이 맞는 것으로 결정하고 내려간다.
흐유....
한사람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길인지 아닌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길... 가파른데다 간혹은 바위도 나오고.. 간혹은 직벽의 길도 나오고... 최순호님의 부인... 오늘이 첫산행인데 정말 힘들었을게다. 신랑인 순호님이 잘 잡아주고 있기는 하지만.. 다음에도 나오고 싶은 생각이 날까?

그렇게 내려가다 보니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길이 이렇게까지 미끄러웠을까 싶기도 하고.

어느 지점부터는 경사로와 우회로가 함께 진행된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경사로로 같이 내려가다가 두어번 미끄러지고 나니, 도저히.....
다들 한두번씩은 미끄러지는 것 같고.
홀로 우회로로 걷기 시작한다. 일행들은 사라지고.
한참을 우회로로 걷다보니 승룡형이 불쑥 나타난다. 경사로로 질러 내려온 것이다.

그러다가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 나왔다. 운한이가 가리켜준 방향으로 가는데 가다 보니 또 길이 갈라지고 앞에는 아무도 없다. 조금 가다보니 성원이가 뒤에서 일행들과 소리친다. 나는 그냥 이길로 가겠노라고 걷는데...
뒤에는 아무도 없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하고. 거의 끝자락쯤 갔는데... 어라? 왠 창고?

통도 환타지아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음악소리가 나는 곳을 어림짐작으로 찾는다. 왼편이다.
왼편으로 길을 다시 잡는데 전혀 길이 아닌 소나무 숲이 나온다. 다급한 마음에 앞으로 치고 나가는데 갑자기 철조망이 나온다.
이런... 완전히 길을 잃었네. 다시 그 지점에서 왼편 위로 길을 잡는다. 한 5분여 걷다보니 약간의 평지가 나온다. 거기서 간신히 길을 찾아 나서니 영취산 정상 가는 길과 양산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다시 망설였다. 음악소리가 나는 쪽으로는 음식점이 있고.. 도로의 왼편으로 가다가 아무래도 불안하여 오른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나 다니는 차량에 데려다달라고 하려다가 그냥 내처 걷는데... 통도 환타지아 가는 길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에 멈췄다. 그리고 길 오른편의 밭을 가로지른 건너편에 빨간 색 버스와 사람들이 몇 몇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검은 바지와 체크무늬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한참을 바라보다 도박하는 심정으로 그리로 가기 시작했다(pcs 016은 산에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라 전혀 전파가 잡히지는 않고...).

.....
  !

우리 일행이다.
그리고 보니 다들 그 길쪽으로 내려온다. 그러면 아마 처음 내가 망설인 길에서 우측으로 가는 것이 맞았던 모양이다.

3년전에 장마때 길 아닌 길로 헤매더니
이번에는 입구까지 다 와서 미인(迷人)이 될 뻔했다...

통도 환타지아로 내려온 일행 몇 명을 태우고, 통토사 앞 주차장에 버스를 세우고 가벼운 뒤풀이를 한다. 아무래도 서울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기에 아주 가볍게 부경의 님들과 회포를 풀기로 한 것이다. 막걸리 석잔, 아니 넉잔이었던가?

서울로 오는 길....
막걸리때문인지 한시간여 아주 푸~~~~~~욱 자고 나니....
서울로 오는 나머니 6시간 30여분은 그야말로 끔찍 그 자체!
(담부터는 먼데는 안갈겨!!!!)

크고 따스한 손을 가진 영태님, 형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외모와 체구를 가진 판수형의 따뜻
한 마음과, 작은 것 하나하나 챙기는 세심한 상국님의 배려로 산행내내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성희도 정말 반가웠고....

다음 산행때는 체력을 좀더 단련해서 중간에서 느긋하게 산행할 수 있도록 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