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 스포츠 클라이밍 여자 세계 챔피언 김자인! ⓒ 곽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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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14일, 슬로베니아 크란에서 열린 스포츠 클라이밍 6차 월드컵, 2010 시즌 마지막 월드컵에서 세계 클라이머들의 시선은 동양의 한 작은 선수에게 쏠렸다. 그녀는 152Cm, 43Kg의 다소 불리한 신체조건에도 2~5차 월드컵(리드부문) 4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경이적인 성적을 기록 중이었다.
세간의 관심은, 그녀가 마지막 6차 월드컵 대회에서 중압감을 이기고 5회 연속 우승이라는 신화를 달성하느냐에 집중됐다. 잠시 후, 장내 캐스터는 소리 높여 그녀의 국적과 이름을 호명했다. 스포츠 클라이밍 불모지에서 월드컵 연속 우승자의 나라가 된 "대한민국", 그리고 주인공 "김자인"이 출전한다는 소리가 장내에 짜릿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맞춰, 김자인(22, 고려대·노스페이스)이 15M 인공 암벽 앞에 섰다. 그녀는 무겁게 짓누르는 부담감을 떨치고 한발 한발 위로 올랐다. 빠르고, 간결하게, 홀드를 움켜쥐고 망설임 없이 암벽을 오르는 그녀는 어떤 선수보다도 강렬하고 빛나보였다. 어려운 홀드를 막힘없이 오를 때마다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그런 감탄과 찬사 속에 그녀는 월드컵 6차 우승의 주인공이 됐다. 이 우승은 그녀가, 자신의 오랜 소망이던 2010 시즌 '스포츠 클라이밍 세계 챔피언'의 꿈을 완벽하게 이뤄낸 증표였다. 리드 부문 세계 1위를 넘어, 통합(리드+볼더링+스피드) 1위를 차지한 김자인은 진정한 스포츠 클라이밍 세계 챔피언이었다. 각국의 선수들과 관중들의 축하를 받으며 그녀는 세계 최고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 '김자인'을 아로새겼다.
그렇기에 더 이상 완등할 고지가 없을 것 같던 세계 챔피언 김자인. 하지만 여기가 그녀의 스포츠 클라이밍 인생,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챔피언 그녀에겐 다섯가지 빛나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 챔피언이 된 기분? 신기하고 이상하고...'좋아요'
월드컵 시즌을 마치고 귀국한 김자인 선수를 만나 특별한 꿈 이야기를 들었다. 당고개 인근에서 지난 20일 김자인 선수를 만났다. 그녀에겐 올해가 잊지 못할 해다. 2010 시즌 챔피언, 월드컵 5연속 우승, 아시아 선수권 7연패란 경이적인 기록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이런 대기록을 세우기까지 위기도 있었지만 김자인은 그 순간을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대회 때 긴장을 안 하는데, 춘천 월드컵(3차) 예선 때는 위기였죠. 국내 첫 월드컵이다 보니깐 주변의 관심이 컸고 덩달아 제 부담도 커졌나 봐요. 이러지 말자 마음을 다잡았는데 효과가 있었는지 우승을 했어요.(웃음) 중국 칭하이(월드컵 5차) 대회 때는 시즌 막바지라 지쳐있다는 느낌이 들고 자신감이 없었죠, 다행히 경기 당일 좋은 컨디션이 돼서 우승을 했습니다. 위기를 잘 넘겨서 시즌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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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클라이밍 세계 랭킹 1위 김자인(22.고려대·노스페이스팀) |
ⓒ 곽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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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자인은 5차 월드컵까지의 성적으로도 이미 2010 시즌 스포츠 클라이밍 여자 챔피언을 확정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마지막 6차 월드컵 출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였다. 스포츠 클라이밍을 진정 즐기는 열정이 김자인을 6차 월드컵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마지막 월드컵은 쉽지 않았어요. 예선 때 실수를 했어요. 그래서 홈그라운드 이점이 있는 미나 미르코비치 선수(세계랭킹3위)가 1위, 전 2위로 결승에 올랐죠.
예선 성적에서 제가 밀렸기 때문에 똑같은 홀드를 잡으면 우승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예선 1위 선수가 떨어진 고비를 잘 넘겨 마지막 대회를 우승으로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5연속 우승이란 환상적인 기록으로 2010 시즌 챔피언이 된 김자인. 그녀는 6차 월드컵 대회(슬로베니아)를 마친 후에야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친오빠이자 코치인 김자하(27)씨의 축하 포옹을 시작으로 동료선수, 관중들의 축하 인사를 수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인천 국제 공항에 우승축하 펼침막이 걸려있던 것도, YTN에 인물 포커스에 초대되어 우승 인터뷰를 한 것도 그녀에겐 특별한 경험이었다.
"신기했어요. 영화 <국가대표> 같은 데 보면, 막 공항에 사람들도 몰려오잖아요. 물론 전 그런 인파는 없었지만, 하하하(웃음). 축하 펼침막도 걸려 있고 그래서 신기했죠. 많은 분들이 축하를 해주셨어요. 아참, 그런데 잘 모르는 분들은 제가 중국 월드컵에도 출전했었기 때문에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딴 줄 아시더라고요(웃음)."
18일 귀국해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자인은 이런 관심이 고맙고 즐겁다. 그래서일까? 세계 챔피언이 된 그녀는 더욱 즐겁게 스포츠 클라이밍을 즐기기 위해 특별한 꿈을 꾼다.
스포츠 클라이밍 세계 챔피언, 김자인의 다섯 가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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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인(22.고려대·노스페이스팀) |
ⓒ 곽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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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목표에 묻자, 김자인은 다섯 가지나 되는 꿈을 말한다. 조심스런 목소리지만, 그 속에는 꿈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꿈 하나. 2011년 월드컵 완등이다.
"2011 시즌에는 월드컵 예선, 본선, 결승 코스를 모두 완등하고 싶어요. 월드컵은 난이도가 높아서 완등이 쉽지 않거든요. 2010년에 못 이룬 꿈을 꼭 이루고 싶습니다."
그녀의 꿈 둘, 스포츠 클라이밍이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이어진 꿈 셋은 아시아게임과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스포츠 클라이밍에서 즐겁게 경기를 펼쳐 우승을 하는 것이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은 협회의 힘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노력해 주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꿈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스포츠 클라이밍이 당구나 바둑처럼 아시아 게임 종목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축구나 카누같이 올림픽의 인기 종목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 대표로 출전해 즐겁게 경기를 펼치고 싶습니다."
정말 그런 꿈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2014년 아시안 게임과 미래의 올림픽에서, 세계 최초 한국 스포츠 클라이밍 금메달리스트를 기대해 볼 수도 있겠다. 이어서 김자인은 네 번째 꿈을 말한다. 오랜 부상을 뚫고 챔피언의 자리에 선 그녀는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응원을 부탁한다.
"지금 최고의 자리에 서 있기에, 사람들이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줄 것 같아 걱정이 돼요. 하지만 1등 만큼, 2등도, 그리고 모든 선수가 최선을 다했기에 모두 박수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부담 없이 즐겁게 경기를 펼치는 스포츠 클라이밍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 김자인의 다섯 번째 꿈은?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당차고 자신 있게 목표를 말한다. 듣는 순간 필자는 귀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여성 스포츠 클라이머도 꿈꾸지 못한 용기있는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지막 꿈! 남자 챔피언 라몬 줄리안과의 멋진 승부
김자인에게는 동경하는 선수가 있다. 2010 스포츠 클라이밍 남자 챔피언 라몬 줄리안(스페인)이 바로 그다. 남성과 여성 스포츠 클라이밍 분야에서 두 챔피언은 서로 닮아있었다. 152cm 김자인처럼, 라몬 줄리안은 159cm의 불리한 신체조건을 딛고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라몬 줄리안의 경기를 관심 깊게 지켜보는 김자인은, 어느 날 특별한 생각을 가졌다. '내가 만약 남자대회에 도전한다면 잘할 수 있을까?' 라고. 그리고 기회는 운명처럼 찾아왔다.
"9월 12일 열린 국내 서울 시장배 여자 일반부에서 재결승 경기가 남자일반부 결승이랑 똑같은 코스, 조건에서 하게 됐어요. 거기서 남자 일반부 선수 1위 기록과 같은 완등 터치를 하고 밑으로 떨어졌죠."
김자인은 '대단하다'는 관중들의 뜨거운 함성을 들으며, 정식으로 남자대회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 10월 24일 열린, 17회 노스페이스 스포츠 클라이밍 대회는 그 무대였다.
이 대회는 명실공히 국내 톱 랭커들이 출전하는 국내 유수의 대회. 김자인은 당초 여자부는 물론 남자부까지 도전장을 냈지만 한국 스포츠 클라이밍 위원회는 규정을 들어 그녀를 정식 선수 대신, 번외 선수로 출전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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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분히 인공 암벽장을 오르는 김자인 선수 |
ⓒ 곽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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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코스보다 멀고, 높은 홀드를 움켜쥔 김자인은 국내 최고의 스포츠 클라이밍 남자 선수들과 뜨거운 대결을 벌였다. 맨 마지막 선수로 출전한 김자인은 앞서 경기를 펼친 남자 선수들이 해내지 못한 완등을 향해 힘을 다해 암벽을 올랐다. 하지만 완등을 눈 앞에 두고, 완등을 해야 하겠다는 조급함이 앞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김자인은 완등을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그녀의 성적은 남자대회 2위에 해당하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무엇보다 완등이 너무 하고 싶었는데 못하고 떨어지니까 저자신한테 실망스럽기도 하고 화도 났었죠. 하지만 이 경기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건 완등에 대한 제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마음이 나를 얼마나 잘 이끌고 있었고 지금 내 모습을 만드는데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 했는지도요.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이 욕심내되, 그런 마음이 내 등반능력까지 지배하지 못하도록 완등을 앞둔 그 순간에는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만 더 침착해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