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클라이머
패트릭 애드랑제... (파이브텐 제공)
파트릭 에드랑제(Patrick Edlinger) 꼭 예수처럼 생긴 프랑스 클라이머가 있다. 그는 클라이밍의 천재 혹은 드림 메이커로 불리기도 한다. 뛰어난 등반력과 외모에서 풍기는 매혹적인 개성은 그를 더욱 유명한 록스타로 만들었다.
파트릭 에드랑제. 열성적이고 사려깊으며 무엇보다도 꿈을 만들며 사는 이상적인 클라이머인 그는 프랑스 프리 클라이밍계의 발전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적당히 헝클어진 긴 금발을 날리며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은 이미 여러 산악 매거진들을 통해 익숙할 것이다. 실로 그의 등반 모습이란 목적지를 향해 위로 올라가는, 부담스러운 상승의 동작이 아닌 실로 수직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무용예술을 보는 듯한 동작을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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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인기 덕분에 그는 여러 장비회사의 고문 사원으로 계약되어 신발 등 제품을 직접 디자인도 하고 실제 등반에 사용함으로써 모델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영화에도 깊이 관여하여 10여편의 영화에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아울러 등반여행 기록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하였다.
파트릭은 1960년 6월생으로 남프랑스 쯔론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스키선수였던 아버지의 덕으로 일찍부터 스키로 체력을 다질 수 있었으며 8세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산에 올랐다. 또한 바닷가에서 태어난 덕에 다이빙과 써핑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클라이밍 외에도 그는 스키와 다이빙에 수준급 실력을 갖고 있다. 본격적인 암벽등반은 볼더로 시작했다. 12세때였다. 집이 타울론(Toulon) 근처에 있어 석회암장을 자주 경험할 수 있었다.
73년 베르동(Verdon)으로 첫 여행을 떠난 파트릭은 이때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모는 그의 등반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생활에 관대한 부모 덕(?)에 파트릭은 정규 의무교육도 대충받고는 일찌감치 탄탄한 프로의 세계로 들어갔다.
17세때 파트릭은 등에 색 하나만 달랑지고 집을 떠났다. 미국에 건너가 요세미테 주위를 돌며 즉석 파트너를 구해 미국 인공등반의 시험대인 몇 곳을 올랐다. 앨 캐피탄의 사우스 버트레스인 노즈(Nose), 하프돔 북서벽 등 몇개의 빅월(Big Wall) 등반과 5.11급의 짧은 루트를 몇 곳 경험했다.
미국에서의 3주일 동안 파트릭은 프로의 등반세계로 들어갈 것을 결심했다. 바위에 대한 대단한 정열, 경쟁적이고 혹독하면서도 매우 정직한 미국 클라이머들에게 파트릭은 큰 감동을 받았고, '인생을 몽땅 바쳐 등반에 임하겠노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국서 돌아온 파트릭은 영국에서 온 론 포셋(Ron Fawcett), 피트 리브세이(Pete Livesey)와 베르동을 방문, 헌신적인 등반활동을 폈다. 고전루트들이 이들에 의해 하나씩 프리로 시도되면서 비로소 자유등반의 포문이 열리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세계 클라이밍계를 주도하는 선두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초스피디한 알파인 클라이밍 기록
에드랑제는 영국을 방문, 여러 루트를 프리로 등반했다. 겨울에는 남프랑스의 볼더장에서 열심히 기량을 쌓았다. 클라이밍에의 새로운 영감을 고취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에드랑제는 70년대 말, 전통 클라이밍 사회와 프리 클라이밍 사이에서 '중간자'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속에서 그는 프리 클라이밍 사회로의 전환에 촉매 역할을 했다.
베르하울트(P.Berhault)와 와상지역의 거벽에서 겨울철 속공등반을 시도, 최단시간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고, 또한 100여 미터가 넘는 3개의 벽을 겨울에 하루만에 오르는 괄목할 기록도 냈다.
80년에는 와상(Oisans) 지역의 뻴부(Pelvoux) 북벽 루트를 솔로로 등반하여 알파인 클라이밍에 새로운 장을 제시했으며 의욕적인 등반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외에도 그는 파트너와 함께 'Tour Ronde' 북서벽을 7시간 30분에 오르는 등 그는 등반마다 '초스피드'라는 기록을 남겼다.
에드랑제는 79년과 80년에 걸쳐 프랑스의 7급에 해당하는 모든 루트를 섭렵했다. 아울러 7a+(5.12a)급 루트를 세개나 솔로로 등반했다. 이는 프랑스 프리 클라이밍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 준 사건적인 등반으로 기록되고 있다.
에드랑제는 정말 예외적인 숙련가라 불릴만 했다. 프리에서 알파인까지, 그것도 최고의 수준급으로 해냈다.
그의 능력은 뛰어나게 우수했고 거의 재시도 하는 일없이 인공라인들을 프리로 혹은 솔로로 올라버려 타 클라이머들을 놀라게 했다.
81년, 프랑스 프리 클라이밍은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는 발전의 해가 되었으며, 에드랑제는 프리 클라이밍의 신동으로 군림했다. 부비에르(J.P.Bouvier)가 파리 근교에 프랑스 최고의 루트인 7c+급의 쉼팬자드롬(chimpanzadrome 5.13a)을 등반함으로써 최초의 5.13급의 루트가 열렸고, 에드랑제 역시 같은 급수인 메디우스(The Medius)를 생 빅트와르(Saint victoire)에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몇 년 후에야 알려졌다.
다른 클라이머가 초등한 것으로 보고되자 그는 자신이 그 루트의 개척자임을 밝혔다. 82년 역시 그는 베르동과 뷔욱스(Buoux)를 오가며 7급의 루트를 여럿 냈다. 뷔욱스에서는 재키 고도프(J. Godoffe)의 악명높은 루트인 라우라(Lhoura, 7b+)를 플래쉬로 올랐다.
아울러 그가 낸 루트인 크리살리(Chrysalis,7b+)와 펜리르(Fenrir,7C+)는 몇 년동안 베르동에서 가장 어려운 루트로 인식되었고, 뷔욱스에서도 그는 르뤼(Le Rut, 7a)와 파드 페(Pas de Pet, 7c)라는 악명높은 루트를 내었다.
타고난 재주꾼 에드랑제는 81년 베르동에서 솔로등반을 하던 중 쟝 폴 쟝슨(J.P.Janssen)이라는 전문 사진가의 카메라에 잡혔다. 단련된 손가락과 발끝을 이용하여 암벽을 오르는 에드랑제의 솔로등반 필름은 '타이밍'이 일치되어 크게 성공했다.
83년 산악 필름 페스티발에서 에드랑제는 솔로 클라이밍 모습을 담은 「손가락에 걸린 인생(La vie au Bout des Doigts)」으로 '록 클라이밍 필름상'을 수상했다.
그것을 인연으로 이후 에드랑제는 수많은 영화에 모델로 등장했고, 그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는 여러 나라에 전해져 프리 클라이밍의 붐을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 너무도 유연한 동작은 등반을 넘어선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 이를만 한 것'이었다고 보는 이들은 말했다.
에드랑제는 한 손가락 턱걸이를 반복하여 실시한다. 84년 그는 새끼 손가락으로 2회 했으며 장지로는 5회를 했다. 이것을 10회 반복하여 한다고 했다. 또한 몸무게와 비슷한 60Kg짜리 하중을 몸에 매단 채 턱걸이를 하여 암벽에서의 밸런스 유지에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창조적인 록 클라이밍에 매료
80년 뻴보 북벽 솔로등반 이후 에드랑제는 더이상 알파인 클라이밍은 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극한의 루트를 열겠다는 것이며 그것을 찾아내는 데 알프스보다는 어프로치가 쉽고 라인이 무궁무진한 작은 암장들이 적당했던 것이다.
"벽의 크기가 3000m인 어려운 라인이라 해도 연속적으로 어려운 것은 아니며 너무 쉬운 곳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베르동에서는 어려운 연속동작이 요구된다. 이때의 상태란 오르는 것 이외는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는 엄격함이며, 그럴때 나는 바위와 일치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알프스에서 1000미터의 수직암벽을 오르느니, 짧지만 고도의 동작과 일체감을 요구하는 루트를 몇 개 오르는 것이 나에겐 훨씬 값지며 즐거운 일이다."
그는 알프스도 왠만큼 경험했으며 그것도 놀라운 기록에 도전한 촉망받던 알파인 클라이머라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그에 의하면 어렵다고 하는 드류 서벽의 아메리칸 다이렉트 루트도 7a 정도로 너무 쉽기 때문에 별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4천m 아래에서야 고소의 영향도 거의 없다고 보아지므로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느니 베르동에서 그같은 노력이면 더 흥미로운 등반을 즐길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인 것이다. 등반에 관한 그의 주관은 뚜렷하다. 그것이 바로 독특한 에드랑제의 개성이기도 하다. 극한의 라인을 추구하는 것이 그의 꿈이라면, 프리 클라이밍이 그 궁극적인 관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 있을 것이다.
84년 에드랑제는 7c(5.12d)의 루트를 단 1회에 프리 솔로로 성공했다. 비록 두번의 등반을 한 뒤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정도라면 한번의 시도로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이당시 프랑스에서는 6a,6b(5.10a, 5.10b)가 온 사이트로 등반되고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고, 독일의 볼프강 귈리히(Volfgang Gulich)가 7a를 온 사이트로 오르며 최고 수준을 지키고 있었다.
프랑스 클라이머들은 그때 7a, 7b급에서는 한번의 시도로 오른 예는 거의 없고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로프를 내려 처음부터 다시 시도하여 오르는 방법으로 등반하고 있었다. 84년 에드랑제에 의해 8b급의 루트가 열렸다. 그는 40미터의 오버행 페이스에 단지 8개의 볼트를 치고 1회 톱로핑으로 등반을 한 후 , 3회 시도때 개끗이 성공했다. 이 루트는 8b(5.13d)급이었다. 그밖에 에드랑제는 당시 최고 루트이던 8급 루트 10개 중 3개를 개척햇다. 그의 첫 솔로등반은 15세때 이루어졌다. 그가 태어난 고장 쯔론의 해안에 있는 80미터의 6급 루트에서였다. 그리고 최초의 프리 솔로는 7a(5.11b)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가 7c+(5.13a)를 온 사이트로 오르고 있을 때의 수준이었다.
그는 오버행이면 모르되 수직의 벽에서라면 어디서든 솔로로 등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테크닉과 자신감이 뒷받침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솔로등반에서의 추락이란 곧 죽음과 직결되는 위험스런 게임이기 때문이다.
에드랑제는 일찌기 암벽대회를 예감했고 클라이밍의 발전에 대회가 큰 기여를 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세계 최강자를 가리려면 솔로로 경기를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각자 자신들의 숙련된 토양에서 최강이라고 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물론 스타일도 포함해서다. 세계 최강이라 꼽히는 제리 모패트, 볼프강 귈리히, 토니 야니로, 존 바카 등과 함께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루트들을 쉬운 곳에서부터 차츰 어려운 곳으로 옮겨 가면서 프리 솔로로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후로 살아남는 자가 세계 최강의 클라이머가 되는 것이다."
각종 암벽대회 패권 차지
세계 최강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은 아마 살아 남을 거라고 했다. 바로 자신이 최강자라는 강력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렇듯 당찬 자신감은 어디서 왔던 것일가? 그의 등반에 대한 자존심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에드랑제는 최강의 클라이머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4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톱로프로 극한의 어려운 루트를 등반한 자이거나 , 둘째 최고의 루트를 플래싱으로 오른다거나, 세째 프리솔로로 최고의 루트를 등반하거나 또한 볼더로 극한의 루트를 오르는 것 등이다. 이 모두는 클라이밍의 종합적인 테크닉을 얻는데 주요한 것이며 이 테크닉을 모두 갖춘자가 최강의 클라이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드랑제는 여러 암벽대회에 참가 혹은 초청되어 패권을 차지했다. 87년에 실내에서 야간으로 진행된 님(Nime) 대회에서의 실수를 제외하면 그는 예외없이 우승을 안았다. 대회에는 모두 관심을 갖고 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모든 대회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대회의 결선 수준은 에드랑제의 온 사이트 등반 레벨과 일치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이 대회의 공식적인 한계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86년 에드랑제는 이태리 대회에서 패권을 차지했고, 88년 다시 이태리에서 열린 아르코(Arco)대회와 최초의 월드컵대회인 미국의 스노우 버드(Snow bird)대회에서 우승했다.
시합을 위해서 그는 열심히 준비했다. 그러나 가장 준비를 했고 또 1위를 하고 싶었던 님의 대회에서 추락을 함으로 해서 그는 쓴 맛을 보았다. 그때 그는 순번을 기다리느라 무려 14시간을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경기를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면 재미있는 것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게임의 순간을 위해 모았던 최대치의 컨디션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기란 어려운 거죠. 아마 대회의 재미와 비밀이 여기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참가 선수중에서도 단연 관중들의 관심과 참가자들로부터도 주목받은 사람이었다. 그러한 시선들의 불편함. 그것이 님의 대회에 작용하기도 했던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 사람들과 관계된 어떤 허구성을 스스로 인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님대회가 가져다준 교훈은 큰 것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85년 또 한번의 미국 등반여행은 그에게 새로운 자극과 더 한층 비약하는 세계로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진가 제라르 코시키(Gerard Kosicki)와 함께 콜로라도, 엘도라도 캐넌 등 미국의 여러 시험대(Test pieces)를 돌며 등반을 했다.
스핑크스 크랙(5.13b), 레인보우 윌(5.13b), 그랜드 일루젼(5.13g), 코스믹 데브리스(5.12a) 등을 멋진 동작으로 등반했고 존 바카가 처음 리드한 러브 수프림 등을 모두 프리로 등반했다. 이곳에서 그는 순수한 등반라인을 즐길 수 있었고 온 사이트 방식의 심리적 게임도, 펌핑 아웃도 실컷 맛보았다고 했다.
"미국 클라이머들은 파트너와 함께 하며 열정을 나누는 것을 온 사이트 등반보다는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액션은 진부해 보였지먄 활발했고, 그 속에서 등반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같았다. 하지만 북유럽과 프랑스의 클라이머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대단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으며 단순한 즐거움으로 클라이밍을 즐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있어 클라이밍이란 곧 일이었다. 한 루트에 6개월씩 매달려 루트를 따내는 일은 정말 싫은 일이다."
그래서 에드랑제는 <당구와 맥주를 즐기며 또한 사교적인 그들>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사실 그 자신은 루트 개척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지는 않다. 에드랑제는 프랑스 클라이머이지만 그의 등반 스타일은 흔히 말하는 프렌치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극히 높은 급수에서도 스스로를 위한 확보는 하지 않는다. 심리적으로 안전한 상태에서 나오는 동작은 썩 훌륭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홀드를 다듬거나 해서 거짓의 등반을 하는 것도 클라이밍에서 맛볼 수 있는 모험을 헤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정을 파괴하는 행위와 같으며 등반 원리적 측면에서도 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창조하는 자유의 클라이머
그는 이 여행을 통해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냈다. 록 게임즈(Rock Games)란 책을 통해 에드랑제는 미국 클라이밍은 대단히 미학적라 했고 그가 방문한 4개 지역에 대한 등반역사 스케치도 해놓고 있다. 에드랑제는 따로 트레이너를 두고 있지 않고 자신의 스케줄을 직접 짰다. 이 역시 등반과 무관한 것이 아니므로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거의 모든 날을 그는 암벽에서 보냈다. 1년에 한 두달은 그가 관계하고 있는 장비사에서 고문의 역할을 하며 직접 디자인을 하기도 한다.
그가 관계하고 있는 곳은 돌로미테(Dolomite), 페츨(Petzl), 비알(Beal) 등이다. 새로운 루트에의 개척과 극한 루트에의 도전을 위해서 한달 정도 휴식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는 가벼운 트레이닝으로 보낸다. 에드랑제는 등반하여 얻어지는 동작과 감각을 대단히 즐기고 있다. '맛'의 감각을 성과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회에 1위를 하거나 극한의 루트를 개척한 클라이머가 등반의 묘미를 완전히 맛보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등반의 감각을 철저히 느끼지 못하면 비록 1위를 했다 하더라도 큰 의미가 없다고 그는 믿고 있다.
대회에 임할 때 그는 벽주위를 살피거나 루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구경꾼 같은 모양이다. 귀에 꽂혀 있는 워크맨에서는 시그러운 헤비메틀이 요란하고, 유난히 긴 팔의 끝엔 클라이밍 슈즈가 들려있다. 시합전 그의 모습이다. 초조하거나 긴장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진정한 의미의 온 사이트란 클라이머가 등반하면서 루트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얻는 것을 말합니다. 단시 한번의 시도로 올랐다고 해서 온 사이트가 아닙니다. 이런 등반은 믿기지 않는 놀라움과 새로움을 내게 줍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곳을 오르려 할때에 사전에 결정하는 시간은 갖지 않습니다."
단지 시합을 위해 또는 루트를 개척하는 것을 위해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더 이상의 나은 등반을 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고 나는 시간이 아주 소중하기 때문>에 열심히 여러 곳을 돌며 등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마음은 철저히 비어 있습니다. 등반하면서 그것이 채워지지요. 나는 바위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함을 느낍니다. 바위는 나의 꿈이며 그것의 실현이 바로 등반행위인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한 나는 계속 바위를 찾을 것이고 또 어디든지 갈 것입니다. 나의 꿈은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를 가리켜 '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새로운 시대의 클라이머를 상징하는 꿈의 창조자. 그것은 바로 에드랑제로 대표되는 것이 아닐까.
<산악인 89년 25호 - 정혜선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