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이야기

뫼오름 시작과 고산(古山)의 옛날 이야기(1)

古山 2008. 1. 24. 09:11

뫼오름 동호회의 시작

내가 암벽등반이 빠지기 전에 나는 그냥 평번한 등반을 하는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산꾼에 지나지 않았다. 나에 본격적인 산행은 아마도 예전에 pc통신이 한참 유행한던 시절이 될것 같다.그때는 5대 통신사(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넷츠고 유니텔)에 통신산악회가
잘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천리안 산사랑같은 경우는 엄청 잘되는 산악회로 꼽는다.

pc통신이야 거의 문자위주로 하고 있었으며 그때 당시는 1440mbps 속도의 전화 팩스모뎀이 통신의 전부였다.그러다 win98의 출시를 기점으로 컴퓨터도 DOS 운영체제에서 win3.1을 시작으로 win95와 win98의 운영체재로 발빠르게 옮겨가며 문자위주의 통신에서 멀티미디어가 가능한 인터넷이 선보이기 시작하며 초고속 통신이란게 나오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먼저시장 개척을 시작한 하나로통신의 회선 가입을 인연으로 나는 인터넷을 매개로한 등산동호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모뎀으로 사진한장 다운받는데도 끈기있는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하였다.허나 이 초고속 상품의 등장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넷이란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이것저것보다가 우연찮게 골프동호회가 아주 잘되고 있는것을 보았다.그래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것으로 예상해 등산동호회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고 게시판에 몇 번에 글을 올린적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0년7월31일 뫼오름 창립기념 산행 북한산 백운대

그러나 예상은 별로 신통치가 않았다. 지금이야 어느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클릭몇번이면 카페나 동호회가 뚝딱하고 만들어지지만 그때까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한 사이트에 동일성격에 동호회가 설립될수 없으며 동호회를 만들려면 최소한의 현재 하나로통신 회선을 쓰고있는 회원으로 12명의 서명이 있어야 가능했다.이건 다른 포털사이트에서도 같은 예외 조항을 두고 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때만큼을 그랬었다.



로고 설명 : 좌측 녹색도형은 산의 형상을 단순화 하고 전체적으로 곡선 처리하여 전형적인 부드러운 우리나라의 산세를 표현하고 중앙의 적색도형은 알파벳 e(electroric의 약자)를 태양의 이미지로 형상화 하여 사이버를 의미하며 추측의 회색및 흑색도형은 사람인(人)자를 겹으로 사용하여 산의 형상으로 도안하여 사람의 모임을 뜻하며 회색은 설(雪)산을 흑색은 암(岩)산을 의미한다.

사이버를 배개로한 산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로고 하였으며 사람인(人)자가 산뒤에 가라도록 하였다.

2000년4월에 게시판 글쓰기를 시작으로 두달이 걸려15명의 서명을 받을수가 있었다.그것은 매일 저녁에 채팅방에 죽치고 앉아 많은 사람들을 설득작업을 한 결과이다.일단 등산동호회 신청을 하고 명칭을 뫼오름이라 했다.등산에 순수 우리말이다.음양오행(잘은 모르지만)을 따저보아도 역시 딱이다.그리고 신청서 송부 동호회 담장자 일일이 확인작업을 걸쳐 12명의 동의를 받아 신청서 접수완료 그리고 서초동 하나로 통신 사옥방문하여 동호회 담당자와 계약서 서명작업완료 홈페이지 제작기간 약1개월 드디어 7월31일 우리는 뫼오름 동호회를 발족을 알리는 창립기념산행으로 12명이서 북한산 백운대를 올랐다.

제2회 민주지산 시산제 차에서 내려 산제 일정을 연설하고 있는 고산

시산제 시작하기 전에 주차장에서 기념 촬영 제2회 민주지산 시산제

제2회 민주지산 시산제 독축하는 초헌관 고산....자일이 보이는것으로 보아 암벽전문가도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말했었다.지금은 과도기로 시작단계이지만 1년후면 회원이 500명이상은 모일것이고 산행또한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나에 대표자리는 그땐 산행전문가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그러니 1년동안만 나를 믿고 따라 달라고........
처음 몇 달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산행을 했으며 가을부터는 보란듯이 45인승 관광버스를 전세내어 산행을 하는 아주 급속도로 동호회 발전이 거듭되었다.
지역은 대전과 충청지역을 시작으로 광주와 전라지역 부산과 경남지역 대구와 경북지역의

2003년 1월 덕유산 정기산행

지역장들이 속속 등장하였으며 서슴없이 지역과 연계산행을 추진하게 되었다.
나에 모든 정열일 이곳에 쏟아부었다.그리고 제일 등산을 싫어하는 마누라까지 설득하여 합류시키는데까지 성공하였다.

2003년 6월 청옥두타산 정기산행

그리고 2001년 3월 드디어 계룡산에서 전국규모로 80여명이 모여 첫 시산제를 지내는 쾌거를 이루었다.4월에는 등산학교를 개설 암벽부 제1기생이 탄생되었으며 암벽에 대해 전혀 문외한 이던 나는 전문가 몇사람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물론 내가 이렇게 등반을 하게 될줄은 그때는 꿈에도 생각해 보질 않았었다.그리고 7월31일 회원은 당초 나에 예상보다 많은 700여명이 모여들었다. 창립제1주년 기념산행및 총회에 나와 1년전에 약속한 내용을 들어 산행전문가 추천을 의뢰했다.그때 우리 동호회에는 나보다 월등한 해박한 산행지식을 가진 회원들이 많이 있었다.나는 그분들이 이 동호회를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회의는 나에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도저히 받아드릴수 없다는 내용이라며 강력반발 결국 모든회원들에 동의를 얻어 연임을 할것인지 그만 할것인지 투표에 부치기로하고 일단 총회를 종료했다.

제3회 천태산 시산제에 모인 회원들 민박집을 하나 빌려 1박2일로 진행 하였다.

투표결과 압도덕인 찬성으로 팔자에도 없는 동호회 대표를 회칙에 의거2년을 더 하게 되었다.매년 10여명에 암벽부 신입생들이 배출되었으며 나는 임기 맨 마지막 3기로 암벽에 첫발을 내 딛었다.그리고 나는 암벽에만 전념하기로 하였다.
허나 화무는 십일홍이라 하였던가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하였던가 세 번에 걸처 대표가 바뀌면서 그리고 하나넷에서 하나포스로 서버이전등으로 다시 하나포스 큐빅으로 이전되면서 많은 등반 자료들이 유실되는 결과가 오고 말았다.너무나 가슴아픈 일아 아닐수 없다. 그리고 2004년 12월 하나포스에서 다음카페로 옮기면서 동호회는 급속히 퇴락하고 말더니 1,300 여명의 회원이 이제는 거의 유명무실해진 동호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동안 운영해 오면서 거의 내 정열을 다 바쳐온 동호회의 쇠락을 보면서 가슴한곳이 아려옴을 누가 알것인가?

               

그동안 산행후기등이 자료가 많이 유실되었지만 일부를 2004년12월 이곳에 옮겨놓았다.물론 클럽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다.